2013년 6월 17일 월요일

주여 당신 종이 여기 (성가 218번)

천주교 신자로서는 아마 이곡을 모르시는 분은 거의 없을거다.  나 자신도 많이 듣고 좋아하는 성가이다.  그러나 오늘 처음으로... 그 성가의 뜻을 깨닳았다.
저희 수녀님께서 우리 성당에 이종철 신부님께서 특강 하시러 오신다고 저에게 알려주셨다. 우와.. 이종철 신부님.. 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미사곡이며 많은 성가를 작곡하신분으로 유명하신 분이기에...
갑자기 오늘 아침에 그분에 대해서 좀 알고 싶기에 인터넷에서 찾아봤다. 제일 먼저 읽어본것이 바로 이것이다...



1. 성가 작곡의 동기

이종철 신부


천주교 신자라면 성가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성가는 참으로 아름다운 기도요,
영혼의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시의 성가집인 시편 책을
언제나 손에 들고다니시며 노래를 부르셨습니다.
특히 성전에 오르실 때, 아침저녁기도 드릴 때, 최후의 만찬 때,
시편성가를 노래 부르셨다는 성서의 기록을 보아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다윗 왕이 처음으로 야훼 하느님께 찬양의 성가를 부르고자
가사와 작곡을 직접 혹은 음악인들을 시켜 만든 것이 바로
구약성서중의 시편이요 또 그것이 천주교 성가의 첫 시작이 된 것입니다.

성가의 위대함은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모습에서 찾아 낼 수 있습니다.
성가의 내용을 보면 우리인생의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주님께 드리는 감사와 찬양, 참회와 자비를 비는 기도,
기쁨과 슬픔, 놀라우신 사랑에 대한 감동과 감격, 아픔과 비탄 속의 절규와 호소 등등
한마디로 하느님과 우리 인간사이의 사랑과 나눔, 대화와 손길이 서로 교차하는
생생한 만남이 깊숙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제가 성가를 작곡하리라고는 감히 생각도 못했던 일입니다.
이렇게 위대한 성가를 만들기에는 나 같은 죄인으로서는
감히 상상도 못한 일이요,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날 제 어머니가 마지막 숨을 가쁘게 몰아쉴 때
넋을 잃고 엄마의 맥박을 꼭 쥐고 멈출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곧 숨과 맥박이 동시에 멈추고 입술이 새파래졌을 때
무슨 영문인지 저는 엄마의 시신을 그대로 둔 채
재빨리 연필과 오선지를 찾아들고 언덕 위의 고향성당으로 달려갔습니다.
엄마의 장례식 때 불러드릴 성가를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다른 형제들은 제 명대로 살지 못하고 돌아가신 엄마의 죽음을
애석해하며 울부짖는 동안 장남인 제가 시신 곁을 떠나 없어졌으니 난리가 났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가 아니라 마을사람들은 나를 미쳤다고까지 생각했을 겁니다.
나 스스로도 지금까지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누가, 왜, 그 순간에 장례미사곡을 만들고자
성당으로 끌고 갔는지 도무지 나 자신마저도 모를 일입니다.
죽어 하늘나라에 가서 주님과 어머니께 물어봐야 대답이 나올 거라 믿고 있습니다.
그때까지도 나는 성가를 감히 만든다는 것은 상상도 못해봤습니다.
하여간 나는 성당에 올라가 성체 앞에 꿇어 눈물과
콧물을 한없이 흘리며 두어 시간만에 입당성가부터
마침성가 그리고 고별식 성가까지 장례미사곡 한 세트를
번개처럼 만들어 내었고, 4부 합창을 연습하여 (누나, 나, 동생 둘)
장례미사 때 엄마의 영혼을 위해 뜨거운 기도를 드렸으며
이것이 내가 처음으로 성가를 만들게 된 동기였습니다.

그때 내 나이 스무 일곱이었고 신학교에서 쫓겨 나와
여자 중 고등학교에서 음악 교사로 있을 때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이종철 신부의 성가곡은 한결같이 슬픈 노래요
눈물과 비탄의 성가라고들 많은 사람들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성가 작곡의 시작이 그랬고
또한 한 사제로서 슬프고 외로운 사람들의 벗이 돼야 하기에
앞으로도 나는 그런 성가를 주로 만들고 싶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천국에서 천사들과 함께 지내는 날
나는 그제야 기쁨과 환희, 찬양과 감사의 노래만
전문적으로 만들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실 엄마의 죽음은 대단한 충격이었습니다.
굳게 믿었던 큰아들은 멀리 외국 유학까지 가서
사제서품 몇 달 앞두고 등산길에서 추락사하여
그곳에 묻혀 버렸고, 형을 대신하여 신부가 되겠다던
저 역시 신학교에서 쫓겨 나왔으니 믿었던 도끼에
발등 찍힌 격이 되자 뇌의 피가 터져 세상을 떠났으니 말입니다.

나는 종종 엄마생각을 하다보면 성모님 생각이 납니다.
믿었던 외아들이 효도는커녕, 동네사람들로부터 외면 당하고 떠돌이 생활을 하더니
설상가상으로 십자가에 발가벗긴 채,
매달려 죽어가는 꼴을 봐야 했던 그 성모님 말입니다.
그러나 다행히 성모님은 머리의 피가 터지지는 않으셨지요.

그날 제 엄마는 평소처럼 주일새벽미사에 참례하고자
우리 집과 같은 벽을 쓰는 바로 옆에 위치한
언양 성당으로 가시던 길이었습니다.
60회갑을 갓 넘었지만 농사일 하랴, 아이 열둘 낳으랴,
열두 자식 기르는 동안 온갖 병치래 돌보랴,
팔순 노인처럼 늙고 유난히 허리가 꼬부라졌습니다.
특히 두 아들의 비운에 속이 얼마나 상했던지 온몸이 망가진 상태였습니다.

차가운 겨울아침 성당 오르는 계단에서 그만 넘어졌습니다.
마침 성당오던 교우 한 분이 부축을 하며 집으로 돌아가 쉬라고 권유했습니다.
그러나 제 엄마는 「이 정도 가지고 주일미사를 빠질 수는 없지요」하며
기어이 성당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비틀거리며 예물 봉헌을 마치고 돌아 나오다 두 번째 또 넘어졌습니다.
교우들이 놀라며 병원으로 가자고 권유했으나
「영성체를 하지 않으면 주일미사가 되지 않으며
미사에 빠진 거나 마찬가지여요」하며 뇌의 핏줄이 터져
혼수상태에 이르렀는데도 끝까지 참았던 것입니다.
성체를 받아 모시고 나오는 길에 세 번째로 넘어졌습니다.

「십자가의 길」의 세 번째 넘어지신 분을 분명 닮았습니다.
즉시 의사를 불러 치료를 하였지만 이미 때는 지나고 말았습니다.
의사는 더 이상 손을 댈 수 없다며 가방을 챙겨 떠나고
임종을 지키는 동네교우들은 넋을 잃고
그저 「예수 마리아」를 외워대고 있었습니다.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달려간 저는 이미 말문을 닫아버리고
숨만 가쁘게 몰아쉬는 어미 품에 머리를 쳐 박은 채 할말을 잊었습니다.

저는 용기를 내어 딱 한마디 외쳤습니다.
「어머니, 제가 어머니를 죽였습니다.
어머니, 제가 바로 살인자요 범인이요 죄인입니다」라고…
이 절규는 지금도 나의 진실입니다.
아직도 나는 죄인입니다.
죄인이요 불효자의 멍에를 벗기 위해 그 뒤 저는 수십 년을 몸부림쳤고
사제가 되는 것이 유일한 효도 방법이라는 걸
깨달았으며, 피눈물 끝에 사제서품을 받았습니다.
비록 부모가 다 돌아가신 뒤였지만 천국에서 함께
기뻐하심을 믿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구나. 참 효도는 부모 죽은 다음에야 할 수 있는 것이구나」라고
저는 자주 강론 때에 되풀이합니다.
어머니의 죽음이 곧 제가 성가를 작곡하게 된 동기요,첫 시작이지만
그 뒤로도 여러 번 포기의 기회가 있었는데도 이상할 정도로
성가작곡의 계기가 이어졌으며 지금은 제 어미가 하늘나라에서 내려주신
은총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또 한번 나를 멍청하게 만든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우리 형제 중에서도 제일 못생기고 제일 병약자며, 제일 바보스런 여동생 하나가
수녀원을 간다고 나설 때였습니다.
엄마 돌아가신 뒤 몇 개월이 안 된 때라 아버지는 홀애비가 되어
여동생이 그나마 돌봐 드려야 할 상황이고 그보다도 더 근심스런 일은
저렇게 못난 아이가 수녀원에 가서 필연코 몇 달이 안 되어 쫓겨올 게 틀림없는데
이걸 어쩌나 하며 당황할 때였습니다.

평소에도 오빠로서 여동생에게
「너는 안돼 너처럼 병치레로 자란 아이는 수녀가 될 수 없어」 라며
여러 번 만류 해왔지만 바로 내일 수녀원 입회하러 간다니 이제 더 이상
말릴 수도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나는 여동생 방에 들어가 하염없이 이런 저런 상념에 빠져 있었습니다.
본당신부님께 고별인사 드리러 나간 사이 별의별 생각을 다하고 무엇보다도
저 못난 아이가 수녀원생활에 배겨나지 못하고
쫓겨 나오면 어떡하나싶어 여간 불안하지 않았습니다.

그 불안은 곧 기도로 바뀌었습니다.
「주님, 당신은 하시고자 하시면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는 분이오니
제발 저 못난 아이를 지켜주십시오」 라고…
그리고 몇 개월 전 돌아가신 엄마의 영혼에게도
기도 해달라고 울먹이며 종알거렸습니다.
그리고 우연히 책상아래에 눈이 갔습니다.
휴지통속에 깨알같은 작은 글씨의 종이쪽지들이 찢겨져 있었습니다.

몇 개를 꺼내어 펴 보았습니다.
「주여 당신 종이 여기 왔나이다. 하얀 소복 차려 여기 왔나이다.」라는
글귀였습니다.
불살라 버리려고 찢어둔 일기였습니다.
저는 갑자기 성가를 만들고 싶은 충동이 생겼고,
그 쪽지들을 차례로 배열해두고 그 위에 곡을 부쳤습니다.

단숨에, 불과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다만 특별한 점은 동생을 주님께 맡겨드리는 애절한 기도로 시작하여
수개월 전 돌아가신 엄마생각 그리고 그 당시 두 번째 신학교에
재입학 했다가 이제는 사제생활에 대한 두려움과 불확신으로
신학교에서 뛰쳐나온 뒤라 내가 못하는 성스러운 성직을 동생이 대신하게 해달라는
주님께의 호소가 함께 상승작용을 한 점이 유달랐습니다.

떠나는 날 아침, 동생의 봇짐에 끼어주며
오빠의 기도가 담긴 노래이니 시간 날 때마다
또 힘들고 어려울 때 불러보라 권했습니다.
그리고 난 뒤 한달 쯤인가 여동생으로부터 편지가 왔습니다.

「오빠, 첫날은 그 노래를 부르며 혼자 울었지만,
다음날은 입회동기생들이 모두가 울먹였으며,
그 다음날은 모든 수녀님들이 흐느꼈습니다」라고…

나는 지금도 부지런히 살아가는 동생수녀를 보면서
이 성가의 은총의 힘이라 생각해봅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떨 때 동생수녀를 보면
버려진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이다.」라는 성서 말씀이 떠오릅니다.

하여간 제일 못생기고 제일 병약하며 제일 바보스런
아이가 어쩜 우리 형제 중에 제일 건강하고
제일 똑똑하며 제일 활동적인 사람으로 바뀌게 되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나는 이럴 때 “신앙의 신비”라고 밖에 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가톨릭성가 218번 / 주여 당신 종이 여기

작곡 : 이종철 신부님 /

주여, 당신 종이 여기 왔나이다
오로지 주님만을 따르려 왔나이다

십자가를 지고 여기 왔나이다
오로지 주님만을 따르려 왔나이다

파란 풀밭에 이 몸 뉘여 주소서
고이 쉬라 물터로 나를 끌어주소서

주여 당신 품안에 나를 받아주소서
내 쉴 곳 주님의 품 영원히 잠드렵니다

주여, 당신 종이 여기 왔나이다
주님의 부르심에 오롯이 왔나이다

하얀 소복 차려 여기 왔나이다
한평생 주님 함께 살고파 왔나이다

파란 풀밭에 이 몸 뉘여 주소서
고이 쉬라 물터로 나를 끌어주소서

주여 당신 품안에 나를 받아 주소서
내 쉴 곳 주님의 품 영원히 잠드렵니다...




읽으면서 내 눈에는 눈물을 참을수가 없었다.  저절로 흐르는 눈물을 닦으면서 계속 읽어 나갔다...  설마 주님께서는 나를 통해서도 정말 그런 기적을 이루시는지....  이 보잘것없는 나를... 음악이란 기초도 모르는 나를...  그러나 이런 글을 읽을수록, 점점 더 확신해진다.  나는 주님의 종이다...  내게 주어진 소명을 따르러 난 길을 나섰다.  어디로 가야할지도 모르지만서도.
이 글에서 이종철 신부님께서 체험하신 번개처럼 곡을 만드신것을 나도 똑같이 체험을 해봤다.  아마도 이종철 신부님께서도 이 곡을 자신이 작곡을 한시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당신을 통해서 곡을 주셨으리가 믿을겄이다.  그때에는 내 자신이 아닌듯 하다. 곡을 만드는것이 아니라 그냥 받아적는 그런 기분...  내가 이종철 신부님처럼 유명한분이 되고싶다는것이 아니다.  오로지 단 한분이라도 내가 이 길을 선택함으로써 도움이 되었다면, 바로 그것이 주님이 원하셨는것이 아닐까 생각하며 오늘도 한걸음을 걷는다.



댓글 1개:

  1. 동생 수녀님의 마음이 느껴져서 눈물이 나네요.
    소중한 마음을 지닌 수녀님도 귀하신 분이지만 그 마음을 소중히 여겨 곡이있는 기도로 만드신 신부님과, 그 모든일을 하신분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이종철 신부님 오시는 그 날 ,피터님께 매우 의미있는 날이 되시길 바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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